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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멋대로/페이스북 펌 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이해하기

by 어빈이 2020. 1. 3.

페이스북 한정석 미래한국 논설위원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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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Mix인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의 자본주의를 자유주의로 이해한다면 이 경우의 사회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로 이해해야 한다.

발터 오이켄의 질서 자유주의를 에크하르트가 수용했을 때, 그 질서(Ordo)의 의미는 초월적 공동체주의로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 거기에 합당한 질서도 주셨다'는 경건주의적 고백에 입각한다.

전체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변별할 수 있는가.

이 능력이 관건이다.

전체주의에는 초월성이 없으며, 공동체주의는 초월성을 전제로 한다. 이 구분의 경계선은 '에덴의 생명나무(지식의 나무)'다.

(*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선악과나무=생명나무는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의 이칭현상인가. 댓글에 지적이 있어 첨기합니다)

창조주가 인간에게 에덴동산에서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대로 따먹되, 생명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고 한 금칙이다.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정녕 네가 죽을까 하노라'였다.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왜 죽는다는 것일까. 모순처럼 보인다.

그것이 섭리(Providence)라는 것이다.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의 판단이 아니다.

독일의 사회적 경제는 이런 섭리와 초월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주의가 자유주의를 견제한다는 입장으로 채용된 것이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은 Agenda 2020처럼 자유주의 쪽으로 기울었을 때 독일 경제는 위기에서 탈출했다.

그러면 공동체주의가 잘못된 것인가?

그렇기 보다는 공동체주의가 전제한 '개인의 자유'를 종종 전체주의가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에덴의 일로 비유하자면, 생명나무 열매만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을 다른 열매도 못 따먹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무엇이 금지된 생명나무 열매이고 무엇은 아닌가라는 인간의 변별력만이 남게 된다. 이 문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Good과 Bad의 변별을 위해서는 믿음이 아니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구별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었다. 사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신의 전언은 따져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문제다.

그 후, 무엇이 생명나무 열매인가하는 Good과 Bad의 문제는 따져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그것을 구별하려는 능력과 노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신중함'(Prudence)을 들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전제함에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집단적인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바로 이 개인들이 자신을 유익하게 하려는 Self-interest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누구나 자기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조화의 원리고 협동의 이유다.

생명나무 열매를 사과로 착각하는 경박함도 문제지만, 오렌지를 생명나무 열매라고 우기는 것도 경박함의 문제다.

모든 에러는 개인들의 경박함에서 비롯된다. 그 경박함을 공동체적으로 예방하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신이 인간을 집단으로 창조하시지 않은 이상에는...

각자 개인들의 선택이 하모니를 통해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결과만 있을 뿐. 그런 성공에 자만했다가 다시 실패하는 것도, 실패했다가 다시 성공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자유의지에 결합된 신중함에 달렸을 뿐이다.

이 글을 꼭 기독교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이해하지 않아도 세상 이치에 들어 맞는 것도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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